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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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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칼라]] 시대 === 카라칼라의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였지만,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스스로 안토니누스 가문를 자처하면서 이름을 개명했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공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였다. 하지만 그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라는 이름보다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 달린 망토를 개량한 새로운 형태의 망토에서 따온 '카라칼라'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아버지의 최후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대결 당시, 카이사르에 임명되었고 일찍부터 공동황제였다. 그런데 어머니 [[율리아 돔나]]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의 연년생 동복동생 [[게타]]에게도 공동황제 자리를 내렸다. 따라서 카라칼라와 게타는 세베루스 생전부터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는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하게 악화됐다. 따라서 세베루스가 [[요크]]에서 사망한 이후, 카라칼라와 게타는 칼레도니아인들과 휴전 교섭을 맺고 로마로 귀환한 이후 권력암투를 시작했다. 카라칼라와 게타의 대립은 황궁과 원로원, 법정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형제는 로마 제국을 둘로 갈라 나눌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어머니 돔나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는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죽이기 위해 암살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여러 번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하자 카라칼라는 본인이 직접 게타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동생 게타를 어머니의 방으로 유인한다. 따라서 AD 212년 2월, 게타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형의 손에 살해당한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이 날 죽이려고 했다"며 자신의 패륜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원로원과 군대를 찾아간 다음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그렇지만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게타가 형 카라칼라보다 확실히 인격적이고 지지가 강했기 때문에, 카라칼라는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충성 보너스를 지급해 그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이후, 카라칼라는 옛 안토니누스 황족들을 포함해, 원로원 의원들과 장군, 관료, 해방노예, 인기 전차기수와 검투사 스타, 철학자와 시인 등 수천명을 재판없이 모조리 살해하고 동생 게타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추락하게 된다. 이에 카라칼라는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대목욕장을 건설하고 병사들의 급료를 인상하였으나 이로 인한 재정부족이 발생했다. 따라서 그는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어 주조하기도 하였다. 카라칼라가 한 정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AD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우스 칙령'이었다. 이제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로마의 모든 속주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카라칼라는 군사적 재능, 업적과 행정가적 자질이 평균 이상으로 뛰어났다. 하지만 그 성격이 잔인하고 독불장군인 까닭에 이런 장점은 업적에 비해 부각되지 못했다. 또 그는 본래부터 허영심이 많았고 스스로를 [[마케도니아]]의 전설적인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여겨 로마를 비우고 군인황제로 활약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를 위협하던 레누스와 다누비우스 일대의 게르만족들은 수십년간 로마를 공격하지 못했고 동방 역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말년까지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AD 212년 게르만족에 대한 원정 당시 무분별하게 동맹부족까지 학살한 행동은 지나칠 정도로 그의 잔혹함을 돋보이게 했다. 또 AD 215년 파르티아 원정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중단한 이후,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을 처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을 학살한 행동은, 서방과 동방 일대의 로마인들에게 잔인함과 허영심만 더 부각시켜 인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군사적 업적과 재능은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했고, 그가 취한 군제 개편 및 방어선 정비 등은 후기 로마제국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AD 216년 카라칼라는 재차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다. 이때 그는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고, 동방 여행 당시 사소한 이유로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룬 행동 등은 카라칼라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결국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백인대장에 의해 AD 217년 암살되었다. 마크리누스는 소원대로 황제가 되었지만 카라칼라가 벌인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왕의 어머니와 그 때까지 손에 넣은 모든 전리품을 반환하는 불리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결국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음모를 꾸며 자신의 외손자인 14세의 엘레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서자로 둔갑시켜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결국 시리아의 군단까지 엘라가발루스의 편에 서자 마크리누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향해 도망쳤으나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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